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었다. 제목은 ‘화이트 러시’.
지난 겨울 ‘히가시노 게이고 설산 시리즈’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구매했던 묶음 책 중 한 권이다.
설산 시리즈. 말 그대로 한겨울 눈덮인 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히 두꺼운 책을 먼저 골랐다. 그게 화이트 러시였다. (다른 책들은 좀 두꺼워 부담스러웠다 ㅎㅎ)
그런데 읽고 보니 ‘화이트 러시’ 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이야기가 있었다. ‘백은의 잭’이라고.
에잇, 그것 먼저 읽을 걸. 뭐 상관없다. ‘프리퀄’을 의도적으로 나중에 풀어놓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여하간 ‘화이트 러시’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면, ‘스키장에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줄거리
한 연구소에서 엄청난 위력의 생물학 무기가 만들어진다. 공식 절차를 통한 것이 아닌 불법적인 것이었으므로, 연구소장은 담당 연구원을 해고하고 무기의 존재를 숨기려 한다.
쫓겨난 연구원은 앙심을 품고 그 무기를 훔친 뒤 스키장에 숨겨두고 협박하는데,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무기는 여전히 스키장 어딘가에 묻혀있는 상황.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으면 무기가 일반인들에게 노출돼 위험할 수 있다.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구리바야시가 스키장 어딘가에 묻혀있을 무기를 찾아 나선다. 단서는 생물학 무기가 묻혀있는 곳에 범인이 걸어뒀다는 ‘테디베어’뿐.
스키 초보 구리바야시에겐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무기를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아들과 페트롤 대원 등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생물학 무기를 찾는 것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묻혀 있는 장소 자체가 험난했던 것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무기를 가로채려는 빌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찾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려는 자 vs 그걸로 돈을 벌려는 자. 스키장에서 마침내 마주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벌인다.
겔렌데를 활강하며 벌이는 격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됐다.
진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글로 쓴 걸 봐서 이렇게 느끼는 거지, 막상 영상으로 눈 앞에 펼쳐지면 좀 어색하다고 느끼려나? 스키와 보드를 타면서 벌이는 액션극이라니 ㅎㅎ 어떨지 모르겠다.
어쨌든 읽는 내내 머릿속에 새하얀 스키장이 떠올라 오랜만에 스노우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독자들에게 읽으면서 겨울 기분을 내라고 쓴 소설인 것 같지만,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에 읽어도 충분히 좋다. 책을 읽는 동안이라도 시원함과 통쾌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인상 깊은 한 문장
‘화이트 러시’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치고는 스토리 구조가 심플하다. 그래서인지 이야기 속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그리 많진 않았다.
그와중에 이런 문장이 후반부에 나와서 확 꽂혔다.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도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인간으로서 실격이란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내 몫까지 행복하길 바라야지. 그러면 틀림없이 그 행복이 넘쳐 내게도 돌아올 테니까.
누군가가 어디선가 불행을 겪으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도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조심하고 최대한 행복해져 그 불쌍한 사람에게 행복이 돌아가게 해야 해.” (325쪽)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스키장에서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는 여성.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녀의 아들 다카노 유키였다.
그들은 신종인플루엔자 유행 때 가족을 잃었다. 그 집안의 막내 노조미였다. 어머니는 그 슬픔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고, 안 그래도 동생에게 전염시켰다는 죄책감으로 힘들었던 다카노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스키장에 묻힌 무기에 대해 알게 되고, 어머니의 슬픔을 또 다른 사고를 만들어 덮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을 꾸민다.
다카노는 어머니의 한을 풀려면 또다른 불행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다카노는 생물학 무기를 중간에서 가로챈다.
그 계획이 결국 무산된다. 다카노의 어머니는 다카노에게 위와 같이 말하고 오해를 풀어주려 한다.
불행을 겪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일어난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데. 다 불행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내버려두면 인간으로선 실격인 거라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말한다. 비록 나는 불행한 일을 겪었지만, 다른 사람은 부디 이런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 결국 나중에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최근 불미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그의 유족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연 재해로, 교통 사고로, 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때 더 이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겠다. 똑같은 일로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아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사회가 된다. 그래야 불행한 일을 겪은 당사자들도 그 행복으로부터 (좋은 의미로) 전염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히가시노 게이고는 ‘화이트 러시’를 통해서 신종인플루엔자, 생물학무기와 같은 것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우리가 하기에 따라 주변으로 충분히 넘쳐 흐르고 전염시킬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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