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습니다. 고전 문학을 스스로 찾아 읽은 건 태어나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엔 자기계발서나, 바로바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서 위주로 읽었는데요. 그런 식의 독서가 이제는 좀 지겨워졌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저렇게 하면 잘 될 수 있다’라며 목소리를 내는데, 그걸 따라가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국은 오로지 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꿋꿋이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책도, 이제는 당장의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한 것보다는 좀 더 큰 가치를 발견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읽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고명환 작가(개그맨)님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해서 즐겨 듣는 편인데요. 그런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고전 문학이 좋은 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라고.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한번 읽어보자!” 하고 처음 찾아서 읽은 책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습니다.
첫 느낌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네?”였습니다.
톨스토이, 고전 문학, 이러면 뭔가 어렵고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잖아요?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책장을 넘기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았습니다.
다만, 주제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이 유독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책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법조계에 몸 담고 있는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향해 가는데, 그때 이반 일리치의 심경 변화와 그의 시선으로 보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묘사가 됩니다.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이반 일리치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되고 대화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대체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되뇌었다. “무엇이냐고? 고통받지 않는 것? 사는 것?” 그가 대답했다.
워낙에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에 또다시 찾아온 통증조차 그의 주의를 흩트리지 못했다.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말이지?”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야 예전처럼 잘, 유쾌하게 사는 것 말이다.”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던가, 잘, 유쾌하게?” 목소리가 물었다.
그는 유쾌한 인생의 최고의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꼽아 보았다. 그런데 기함할 노릇이었다. 유쾌한 인생의 모든 최고의 순간들을 이제 와서 돌아보니 전혀 다르게 여겨졌다. 어린 시절의 첫 추억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랬다.
저 어린 시절에는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더라도 정말로 기꺼이 더불어 살 수 있을 만한, 뭔가 유쾌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유쾌한 것을 누리던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람에 관한 추억 같았다.
지금의 그, 즉 오늘날의 이반 일리치를 만들어 준 것들이 떠오르자마자 당시에 기쁨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이 이젠 그의 눈앞에서 싹 녹아 버리며 뭔가 하찮은 것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88쪽)
죽음이 앞에 왔다고까지 느끼지는 않았었지만, 저도 2년 전 늦가을 병원 신세를 크게 진 적이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론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병이었지만 본질적 원인은 과로와 스트레스였습니다.
고통스러운 병 치료 과정을 겪고 일주일 가까이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느낀 가장 큰 감정은 후회였습니다. 그동안 너무 잘못 살아왔다는 느낌.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뭐 하나라도 더 성취해 보려고, 보란듯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살았습니다. 그게 행복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것)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었어야 하는 건데!’
죽음을 앞두고 이런 후회를 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는 과정에서 놓쳤던 것들을 떠올립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 좋아하는 것을 하는 과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한 감정.
이반 일리치도 ‘이 사람과 결혼만 하면 행복하겠지’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정보다는 일에 집중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괜찮은 삶일 거야’ 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그리하여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쁨들은 더 하찮고 의심쩍게 변했다. 법률 학교 시절부터 그랬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뭔가 진정으로 좋은 것이 있었다. 그때는 즐거움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단지 고학년만 되어도 좋은 순간은 이미 줄어들었다.
그다음 도지사 밑에서 처음 근무하던 시절에 다다르자 다시 좋은 순간들이 생겨났다.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의 추억이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이더니 좋은 것은 훨씬 줄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좋은 것은 계속 더 줄어들었다.
결혼이란…… 그토록 무심코 한 결혼은 환멸과 아내의 입냄새, 관능과 가식뿐이었다! 저 죽음 같은 업무와 돈 걱정, 그렇게 일 년, 이 년, 또 십 년, 이십 년, 모든 것이 한결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죽음 같다.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 준비 끝, 죽어라! (89쪽)
그래서 이건 무엇인가? 대체 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삶이 이토록 터무니없고 역겨울 수 있을까? 정확히 그토록 역겹고 터무니없다면 대체 왜 죽어야 하며, 또 왜 죽어 가면서 고통받아야 하는가?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89쪽)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투쟁하려는 충동, 그가 당장 떨쳐 내려 했던 아득한 저 충동이야말로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장도, 삶의 방식도, 가족도, 사고계와 직장의 이해관계도,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돌연 스스로 변호하는 데에 참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자 변호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97쪽)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결국은 죽음의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지나온 인생을 처절하게 후회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고.
그렇다면 죽어 가면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 마지막 순간에 약간의 힌트를 남겨둔 것 같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 인생의 많은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하고 염려하고 그들을 아끼는 것.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그들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보듬어주기 위해 사는 것.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그러한 생각은 또 희미해져가기 마련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죽음’은 무거운 주제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속 주목한 문장들]
그녀가 대화를 재개하며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음이 분명한 용건을 말했다. 그 용건이란 남편이 죽은 뒤 어떻게 국고에서 돈을 타 낼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물론 부인은 표트르 이바노비치에게 연금에 관한 조언을 구하려는 척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소한 사항, 심지어 그도 모르는 내용까지, 예컨대 이런 경우에 국고에서 돈을 긁어낼 수 있는 모든 방도를 알고 있음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좀 더 많은 돈을 긁어낼 만한 방법이 없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18쪽)
이반 일리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결혼생활, 적어도 자기 아내와 함께 하는 결혼생활이 유쾌하고 품격 있는 삶을 항상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종종 파괴함을, 따라서 이런 파괴로부터 자신을 꼭 지켜야 함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는 그 수단을 모색했다. 프라스코비야 포도로브나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업무였다. 결국 이반 일리치는 업무와 그 의무를 무기 삼아서 자기만의 독립적인 세계를 쌓고 아내에게 대항했다. (29쪽)
이반 일리치를 제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왠지 모두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아플 뿐 죽어 가는 것이 아니며, 잠자코 치료를 잘 받으면 뭔가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묵인하는 거짓말 말이다.
그는 무슨 짓을 하든 더 괴로운 고통과 죽음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즉 모두가 그들 자신도 알고, 그도 아는 사실을 부인해 가며 오히려 그의 끔찍한 처지를 두고 거짓말을 하려 들 뿐 아니라, 그에게마저 거짓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72쪽)
오직 게라심만이 이런 처지를 이해하고 또 가엾이 여겼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오직 게라심과 있을 때만 유쾌했다. (중략) 게라심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정황으로 보건대 분명히 그 하나만이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그 점을 숨길 필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그저 쇠잔해 가는 병약한 주인 나리를 불쌍히 여길 따름이었다.
심지어 한번은 이반 일리치가 이제 그만 가 보라고 하자, 곧장 이렇게 반문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될 텐데요, 수고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가?” 다름 아니라 그의 말에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일이니 별로 수고롭거나 버겁지 않고, 또 자신이 이런 처지일 때 누군가가 같은 수고를 베풀어 주길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73-74쪽)
‘지금 너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법정에서 집행관이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할 때처럼 그렇게 사는 것? 재판을 시작,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렇다, 이건 재판이다! 그렇지만 나는 죄가 없다!’ 그는 악에 받쳐 스스로에게 고함을 쳤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울음을 멈추고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계속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공포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따금 모두 자기가 잘못 살아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당장 자기 삶은 모두 옳았노라고 회상하며 그는 이 이상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90쪽)
내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쳤다는 의식을 지닌 채 삶을 떠난다면, 그걸 바로잡을 수조차 없다면 그때는 뭐지? 그는 똑바로 드러누워서 자기 인생을 통째로, 완전히 새로이 되짚어 보았다.
아침에 하인을, 그다음에 아내를, 그다음에 딸을, 그다음에 의사를 보았을 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난밤 그의 앞에 펼쳐졌던 끔찍한 진실을 확증해 주었다.
그들에게서 그는 자신을, 그의 삶을 지탱해 온 모든 것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또 이 모든 것이 삶과 죽음을 뒤덮은 끔찍하고 거대한 기만임을 또렷이 깨달았다. 이런 의식이 육체적 고통을 열 배로 배가했다. 그는 끙끙 앓고 몸부림치고 옷을 쥐어뜯었다. 그 의식이 숨통을 조이고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모두를 증오했다. (9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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