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의 어느 날, 아이와 놀아주다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끄적이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렸을 적 만화책을 보며 그림 따라 그리기를 좋아했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을 특히 좋아했다.
직장 생활 외에 다른 흥미거리를 찾고 있던 터라 나는 당시의 그 감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나에게 뜻밖의 손재주가 있을지도 몰라. 아니, 그게 없더라도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손글씨를 써보자. 캘리그라피.'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서점으로 향했고 가장 눈에 먼저 띄었던 손글씨 연습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게 바로 <왕초보 7일 완성 손글씨>였다.
책을 사들고 가서 아내에게 부여주었더니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캘리그라피 하려면 이런 것부터 해야 된대?"
"글쎄, 잘 모르겠어. 그냥 부담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샀어."
당시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처가댁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이것저것 갖춘 상태에서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기에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펜으로 연습할 수 있는 이 책을 선택한 이유였다.
애초에 7일 이내에 끝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책 내용만 봐도 그랬다. 제목엔 '7일 완성'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있었지만 페이지 수가 꽤 됐고, 거기다 연습할 글자 수도 정말 많아보였다. 그뿐이랴. 본 책 말고도 연습용 책이 부록으로 붙어 있었는데, 그것까지 하려면 몇 달은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을 다 떼는 데 1년 가까이 걸릴 거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심지어 연습용 부록은 반도 채 끝내지 못한 상태다. 이제와 실토하자면 중간에 회사 일이 바빠져 손글씨 연습의 흐름이 잠시 끊겼었다. 자주 못하다 보니 흥미도 떨어졌다. 그렇게 두세 달 정도를 보냈나 보다.
바쁜 시기가 지나가고 여유를 되찾으니 다시 손글씨 생각이 났다. 다시 재개한 것이 7, 8월 쯤이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 지금까지만 하더라도 4, 5개월은 되는구나. 참, 책 한 권으로 오래도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라고 끝낸 게 어딘가! 나의 끈기에 스스로 박수를 보낸다.
한번은 손글씨를 쓴 뒤 사진을 찍어 보았다. 그런데...오? 꽤 그럴싸해 보이는 게 아닌가. (물론 손글씨 고수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다만, 악필인 내가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게 됐다는 데 놀랐다.)
가끔 아내에게도 손글씨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줬다. 그닥 흥미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보여줄 때의 나는 기분이 좋았다. 뿌듯하기도 하고. 더 많이 쓰고, 더 자주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만들어낸 뭔가를 보여주고 인정받는다는 것. 그건 내가 그 일을 해나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새로 하나 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계정이 있긴 했지만, 손글씨 전용을 갖고 싶었다. 지인들 모르게 하고 싶기도 했고.
오픈한 지는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팔로워 수가 늘고 있다. 내가 먼저 이 사람 저 사람 선팔을 해서 받아낸(?) 맞팔들도 있지만, 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이로 인해 조금씩이라도, 매일같이 손글씨 연습을 하게 된다면 내 계획은 그것만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한글 캘리그라피였는데, 소싯적 배운 영어 필기체 생각이 나서 요즘은 그것도 함께 연습하고 있다. 사실 영어 필기체 쓰는 게 더 재미있...다. 써놓고 보면 더 예뻐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아직 미숙한 점이 많다. 재야의 고수들이 훨훨 날고 있는 인스타그램에서 선보이기에 내 글씨는 초라한 수준이다. 한글이든 영어든.
꾸준히 연습해서 내년 이맘때 쯤이면 완전 완전 고급지고 예쁜 손글씨를 써낼 수 있게 되길, 심지어 실명으로 가지고 있는 계정에도 당당하게 업로드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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