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연애의 행방’을 읽었습니다.
* 이런 분들에게 추천드려요
- 재미있는 소설 책 읽고 싶은 분 / 연애소설 좋아하시는 분 / 색다른 느낌의 소설책을 찾는 분
연애의 행방은 스키장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설산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 ‘백은의 잭’을 읽었었는데 추운 날씨에 하얀 설원을 상상하며 읽으니 재미가 배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설산 시리즈 나머지 작품들도 후다닥 읽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연애의 행방. 표지가 분홍분홍했던지라 설산 시리즈로 묶어서 나온 책들 중 유난히 튀어 보였습니다. 제목도 ‘연애’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게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인가? 싶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면, 정답입니다. 연애의 행방은 스키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젊은 남녀의 ‘골 때리는’ 연애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요.
처음엔 단편집인 줄 알았습니다. 두 챕터 정도 읽었는데, 서로 다른 등장인물이 나와서 ‘아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책인가보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뒤로 갈수록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서로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과 같은 옴니버스 형식의 구성이라고 이해하시면 좀 더 와닿으실 것 같아요.
그만큼 많은 등장인물이 있고, 또 각자가 처해 있는 사연도 많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렇게 헷갈리거나 혼란스럽진 않았어요. 누가 누군지, 어떤 관계인지 중간중간 충분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복잡하다 싶으시면 읽으시면서 메모지에 인물 관계도를 그려가시면서 보는 것도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되실 것 같아요.
* 느낀 점 3가지 (내용 언급이 살짝 있습니다!)
1) 추리소설 작가는 연애소설도 심장 쫄깃해지게 쓴다
와, 저는 애초에 연애소설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지만요. 이렇게 ‘재미있다’고 극찬하며 본 소설은 더더욱 없었어요.
딱 한 챕터 읽었을 뿐인데 너무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추리소설 작가가 연애소설을 쓰면 이런 게 나오는구나…!’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어요.
가장 첫 순서로 나오는 이야기를 살짝 소개해드릴게요. ‘곤돌라’라는 제목인데요. ‘고타’라는 남자가 등장해요. 약혼녀가 있는데 몰래 ‘모모미’라는 여자와 스키장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웬걸, 곤돌라에 합승한 여자들 무리 중에 약혼녀 ‘미유키’가 있었어요. 다행히(?) 고글에 페이스마스크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미유키 일행의 대화에 고타가 계속해서 언급되고 또 모모미가 계속 말을 걸어오는 상황은 고타를 미치게 만듭니다.
곤돌라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심장이 쫄깃해지는 대화와 고타의 심경이 묘사가 되는데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더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느껴졌어요.
첫 챕터의 마지막 부분, 별일 없이 마침내 곤돌라 하차장에 도착하고 내리려는 순간…고타뿐만 아니라 독자인 저까지 안심하는 바로 그 순간! 미치고 환장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고타가 몰래 함께 여행온 모모미와 약혼녀 미유키가 고등학교 동창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거기까진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는데, 둘이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미유키가 약혼남 고타의 사진을 보여주기에 이르러요.
그렇게 첫 챕터 이야기가 끝나는데요. 아침 출근시간에 그 부분을 읽다가 회사 도착할 때가 돼서 책을 덮었는데, 길에서 혼자 막 킥킥대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 저 상황에 있었다면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ㅋㅋ 으.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이 에피소드 말고도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저마다 조금씩 깜짝 놀랄 반전 요소가 숨어 있어요.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실 겁니다.
2) 이것이 시리즈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연애의 행방’은 설산 시리즈를 쭉 놓고 봤을 때 유일하게 추리소설이라 할 수 없는 책인 것 같았어요.
제목도 표지도 톤이 이것만 너무 달라서 뭔가 독립적인 이야기일 거란 추측을 했습니다. 그래서 읽기를 나중으로 미뤘던 면도 있었는데요.
그런데 설산 시리즈 중 뒷 순서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바로 설산 시리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네즈’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중반부쯤, ‘마호’라는 여자와 결혼한 ‘쓰키무라’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와요. 마호와 쓰키무라는 스키장에 가면 스노우보드를 즐겨 탔는데 마호의 가족은 ‘스키’만을 타는 가족이었죠.
단순히 스키를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니었어요. 마호의 아버지는 스노우보드라면 아주 치를 떠는 분이었죠. 스노우보더들은 모두가 불량한 종족(?)이기 때문에 스키장을 함께 이용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마호의 아버지가 스노우보더들에 대해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 수 있도록, 마호와 쓰키무라는 합심해서 작은 일을 꾸밉니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패트롤 대원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네즈’였어요.
네즈가 등장하는 씬에서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더군요. ‘여전히 스키장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하면서요.
백은의 잭, 화이트 러시에서 살벌한 사건을 겪으며 맹활약을 한 바 있는 네즈가 이렇게 카메오 느낌으로 등장하니까 무척 반가웠어요. 몇 권의 소설을 함께 하며 저도 모르게 ‘설산 시리즈’ 세계관에 빠져들었나 봅니다.
이게 바로 시리즈 소설을 읽는 묘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만약 가장 첫 순서로 이것부터 읽었다면 그런 소소한 재미는 또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설산 시리즈 다른 소설처럼 네즈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좋지만, 연애의 행방처럼 이렇게 은은하게 등장해 조연급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도 정말 매력있어 보였어요. 설산 시리즈가 추가로 집필되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ㅎㅎ
3) 수미상관의 매력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 ‘연애의 행방’. 이 소설의 마지막 매력 포인트는 ‘수미상관’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아까 첫 번째 챕터가 ‘곤돌라’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마지막 챕터는 ‘곤돌라 리플레이’예요.
챕터 제목만 비슷한 게 아니라 실제로 첫 번째 챕터의 이야기와 ctrl+c/v 한 것과 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여기서부터는 너무나도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똑같은 구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상황에 등장하는 똑같은 사람들, 하지만 묘하기 바뀌어버린 입장, 거기서 오는 긴장감 넘치게 오가는 대화와 감정 묘사는 ‘이 부분이 클라이맥스구나!’ 라는 느낌을 주거든요.
마지막 장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연애소설이라니. 최근 읽은 소설들 중 ‘재미’ 면에서는 단연 1등이었다고 생각해요.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이 디폴트로 발생하죠. 그만큼 살벌한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데, 이렇게 연애를 소재로 한 소설도 흥미진진하게 쓸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에 정말 놀랐어요. 작가의 필력에 다시금 박수를 보내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가 커버할 수 있는 이야기 장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이런 골 때리는 이야기도 자주 써줬으면 좋겠어요.
추리소설로만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를 만나오셨던 분이라면 이 소설이 작가의 또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합니다.
적극 추천드리며! 의도치 않게 길어진 글을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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