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꿈꾸는 강낭콩입니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있어서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외사랑’입니다.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을 모르시더라도 그의 작품 제목을 들으면 다들 ‘아~’ 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 등 유명한 작품이 많거든요. 저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은 이후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로 신간이 나오면 읽어보려 하고 있고, 과거의 작품들도 하나씩 섭렵하고 있어요.
‘외사랑’은 2022년 9월에 나온 책인데요. 완전 신간인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나서, 이 이야기가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세상에 한번 나왔던 것임을 알게 됐어요. 과거에 펴낸 것을 단행본으로 다시 엮어 낸 것이라고 하네요.
그 사실이 놀라운 게 뭐냐면, 소설의 소재가 20년 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정서, 또는 문제의식에 너무나 잘 맞습니다. ‘외사랑’은 ‘젠더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이거든요.
이야기는 어느 대학교 미식축구부 동창회가 있었던 밤에 시작됩니다. 모임을 파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매니저였던 ‘미쓰키’가 나타나요. 그리고 고백합니다. 사실 자기는 몸은 여자이지만 마음은 예전부터 남자였다고. 지금은 몸도 남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미쓰키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털어놔요. “사람을 죽였다”라고요.
미쓰키의 고백을 들은 대학 동창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살인범으로 체포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의 성정체성을 지켜주고자 노력해요. 경찰과 언론의 눈을 피해 한발 먼저 앞서고자 하는 친구들의 노력을 따라가다 보면 사건 이면에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는데요.
먼저, 평소 우리가 우리의 성역할을 얼마나 극단적으로 둘로 나눠 생각해왔는지 알게 돼요. 이내 우리는 완벽히 그럴 수 없다는 걸, 그 생각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데쓰로는 보통 모범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아내의 이미지를 리사코에게 요구하는 자신을 자각했다. 착실하게 가정을 지키고 남편이 편안하게 지낼 환경을 만들어주는 아내 말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남자들이 멋대로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태도에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아내를 응원하면서 속으로는 그녀가 좌절하기를 기대했다. 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서기를 꿈꿨다. (97~98쪽)
이 세상에는 ‘여자’, ‘남자’로 명확하게 선을 그어 그분할 수 없는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해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자의 몸을 가졌지만 남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 또 그 반대인 사람, 또 ‘반음양’이란 존재를 통해, 한편으론 ‘카스트라토’를 언급하며 화두를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하고 말이죠.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 결정해 한쪽 기능을 버리라는 말을 듣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망설여져?”
“그게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리면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해봤자 고집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쓰미는 이렇게 전제하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어엿한 인간이니까요. 장래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267~268쪽)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반음양’ 무쓰미의 말이 특히 와닿았습니다.
얼핏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를 그렸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합니다. “이건 절대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작품을 읽다 보면, 남성과 여성이란 성 정체성을 ‘뫼비우스 띠’에 비유하는 대목이 나와요.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의 띠의 앞뒤와 같아요.”
“무슨 뜻이죠?”
“일반적인 종이의 경우 뒤는 언제나 뒤죠. 앞은 영원히 앞이고요. 양쪽이 만날 일도 없어요. 하지만 뫼비우스 띠는 앞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면 어느새 뒤가 나와요. 즉, 양쪽은 연결되어 있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뫼비우스 띠 위에 있어요. 완전한 남자도, 완전한 여자도 없어요. 또 각자가 지닌 뫼비우스 띠도 하나가 아니에요.
어떤 부분은 남성적이지만, 다른 부분은 여성적인 것이 평범한 인간이에요. 당신 역시 여성적인 부분이 얼마든지 있어요. 트랜스젠더라 해도 똑같지는 않아요. 트랜스섹슈얼도 다양하고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 사진 속 인물도 육체는 여자인데 마음은 남자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다 담을 수 없어요. 내가 그러하듯.” (아이카와와의 대화 중 421쪽)
많은 사람은 자신이 뫼비우스의 띠 위에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짝사랑을 계속하고 있다. (697쪽)
우리는 주변에서, 혹은 언론에서 가끔 보이곤 하는 ‘성소수자’들을 말 그대로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세계는 몇몇 특이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저 또한 그랬구요.
하지만 그런 시선으로는 그들이 겪는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소설 ‘외사랑’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젠더 이슈’라고 하면 일단 얼굴부터 찌푸리실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외사랑’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나의 생각이 잘못 되었을 수 있겠구나’,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을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실 거예요.
사실 그런 심도있는 메시지를 차치하고서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니까요.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외사랑’ 리뷰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밖에 주목한 문장들]
1. “기분 나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어릴 때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했지?”
“네. 그렇죠.”
“지금은 어때? 마음에 변화가 있나?”
무쓰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런 생각은 잘 안 해요. 해봤자 소용도 없으니까.”
“하지만 편의상 여자로 생활하고 있잖아.”
“그야 뭐, 그냥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주위도 어느 쪽으로든 통일하지 않으면 곤란해할 테고.” 부루퉁한 말투에 주위 사람들에 대한 차가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265~266쪽)
2. 한 사람은 여성의 마음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데 죄책감을 느꼈고, 다른 한 사람은 남성으로 여성을 사랑하면서도 육체가 여성인 것에 괴로워했다. 자살이라는 결론은 같았으나 그곳에 도달한 길은 전혀 다르다.
다만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이른바 윤리라 불리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윤리가 반드시 인간의 옳은 길을 드러낸다는 보장은 없다. 대부분은 그다지 대단한 근거도 없는 사회 통념에 불과하다. (397쪽)
3. “그 애는, 카스트라토예요.”
“카스트라토라니, 그 카스트라토?!”
“맞아요.”
소년기의 미성을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하려고 어릴 때 거세한 남성 가수를 말한다. 데쓰로는 파리넬리라는 유명한 카스트라토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본 적 있다. (478~479쪽)
4. “나, 여러 번 물었어. 왜 미식축구를 그만뒀냐고. 당신은 진짜 이유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고. 이젠 질렸다거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게 없어졌다는 둥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만 늘어놨지. 내가 끈질기게 캐물으면 당신은 끝에 꼭 이렇게 말했어. 남자의 세계니까 참견 마. 기억해?”
“…… 기억해.”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당신과의 결혼을 보류해야 했어. 꿈을 버리는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는 상대와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네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리사코는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 얘기하주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려주지 않으니까 우리 생활이 불안해진 거야. 결국은 당신이 내게 원한 것은 마음을 허락한 상대도 아니고 좋은 파트너도 아니었어. 당신에게는 아내는 이런 것, 엄마는 이런 것이라는 정의가 있고 그에 나를 맞추었을 뿐이지. 그래서 내 마음에 그런 대못을 박으면서 망설임이 없었어.“ (516쪽)
8. “남자의 호적을 손에 넣어도 몸 사리며 사는 것은 변함없네요.”
“오히려 마음의 부담은 더 커졌을지 모르지. 그래서 나도 요즘 가끔 생각해. 나카오가 했던 말을. 단순히 사물을 거울에 비춰 거꾸로 보이게 한 것뿐이지. 내용은 하나도 좋아진 게 없지 않나, 하고 말이야.”
(5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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