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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아무 거리낌 없는 삶을 살고 있나요?” 녹나무의 파수꾼(히가시노 게이고) (*스포일러 주의) 소설책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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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일상이 이어집니다.

연초에는 뭔가 파이팅 넘치는 기운으로 보내야 할 거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연말까지는 기세가 좋았는데, 얼마 전 그게 팍 꺾였어요.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럴 때 다른 일을 하면 되거든요. 어떤 걸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몇 가지 구비(?)해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하면 상당한 도움이 돼요.

그중 하나가 ‘소설책 읽기’입니다. 2, 3년 전에 우울증으로 좀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터득한 저만의 노하우예요.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서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거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면 현실의 고민, 스트레스가 날아가버려요.

장르가 ‘판타지’라면 그러한 감정은 배가 됩니다. 감동 코드가 추가되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요.

처음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우울할 때 보면 좋은 책”으로 소개해드린 적도 있었는데요.

그 책을 읽은 이후로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땐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녹나무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폈어요.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로 더 유명합니다. ‘용의자 X의 헌신’, ‘라플라스의 마녀’ 등 영화로 치면 ‘스릴러’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많이 쓰는 작가예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만 재미있게 쓰는 분은 아닙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고 알았어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주는 소설을 쓰시는 분이구나.

이번에도 그런 감동코드를 다시금 느껴보고 싶어서 어두운 이야기보다는 판타지 쪽 소설은 없는지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고른 게 ‘녹나무의 파수꾼’이었어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처럼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족과 삶,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부터 스포가 있습니다.)

녹나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싶으면 녹나무에 가서 소원을 빌듯, 그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걸 ‘예념’이라고 해요.

그 메시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이후에 녹나무에 찾아가 나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했던 사람을 생각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 보듯이 나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알게 돼요. 그 의식은 ‘기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녹나무에 예념을 하다 보면 내가 굳이 전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같이 전해진다는 거예요. 남에게 보이기 싫었던, 나만 아는 부끄러운 모습이라든지 숨기고 싶었던 나쁜 행동과 생각들이 노출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을 웬만하면 살아 생전에 후손들에게 녹나무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마치 유언을 남기는 곳처럼 녹나무를 활용하고 있었던 거죠. 아무리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한들, 어차피 나는 죽어버리고 없으니 부끄러움을 느낄 일도 없겠죠.

그런데 ‘녹나무의 파수꾼’ 등장 인물 중 사지 기쿠오라는 중년 남성이 딸에게 완전 발가벗겨질 위기에 처합니다.

딸 사지 유미 몰래 큰형님의 예념을 받아오다가 딱 걸리고 말았거든요. 유미는 최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버지의 뒤를 밟아 오던 참이었죠.

그러다 딸 유미는 녹나무의 비밀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보름달이 뜬 밤마다 기념을 하는지도 이해하게 돼요.

여기서 자세히 다 풀어놓을 순 없지만, 아버지가 기념을 통해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돕기 위해 자신도 녹나무에 기념을 하기에 이릅니다. 큰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에게 예념을 하게 함으로써 말이죠.

그 결심을 하기 전, 아버지 사지 기쿠오는 망설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내 머릿속을 통째로 딸아이에게 드러내야 해. 과연 그렇게 해도 좋을지 어떨지, 아무래도 결심이 서지를 않아.”

사지는 하려는 말이 뭔지 레이토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건 그러니까, 유미 씨에게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이에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인간이란 게 누구라도 노상 올바른 짓만 하면서 사는 건 아니야. 죄가 되지는 않더라도 도덕에 반하거나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크든 작든 있게 마련이지. 나 역시 남들 비슷한 만큼은 그런 게 있어. 아니, 어쩌면 남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지. 그런 걸 죄다 내 딸이 알아버린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무서워지더라고.” (455쪽)


저라도 두려울 거 같았어요. 현실에 정말 저런 녹나무가 있다면, 나는 예념을 할 수 있었을까.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면들이 있으니까요.

사지 기쿠오는 딸의 단호한 한 마디에 결정적 한방을 먹고 결국 예념을 하러 갑니다. 그 말은 이거였어요.

“양심에 거리낄 만한 일이 없다면 예념을 하고 와줬으면 한다. 혹시라도 예전의 나쁜 짓을 알게 되더라도 이번만은 눈감아주겠다. 어떤 형태로든 가족을 배신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라.”

ㅎㅎ 이 말을 듣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아버지가 있을까요? 딸이 정말 영리했던 거 같아요. 아빠를 꼼짝 못하게 휘어잡아 버리다니..ㅋㅋ

하지만 동시에, 딸 사지 유미에게도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자기가 평소에 알던 아빠와는 다른 아빠의 모습을 마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용기를 낸 부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묻는 듯 했습니다.

거리낌 없는 삶을 살고 있나요?


‘녹나우의 파수꾼’은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대개 두껍더라구요.

늘 주문한 책을 받아보고는 ‘언제 다 읽지…? 내가 이걸 읽을 수 있을까?’ 하고 한숨을 쉬게 되지만, 결국은 재미있게 완독하게 돼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은 ‘믿고 보는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힘들고, 무기력하고, 지쳤다고 느끼신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로 기분 전환 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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