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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 리뷰 :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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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었습니다. 장강명 작가는 11년에 달하는 기자 경력이 있으신 분인데요.

 

그래서인지 이 분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취재가 정말 잘 됐다, 그걸 소설에 잘 녹여냈다, 그래서, 읽고 있으면 씁쓸하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어두운 면이 없었나, 내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런 어두운 면이 느껴졌을 때 지지하거나, 적어도 방조한 적은 없었던가,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난 번에 읽었던 <산 자들>을 읽으면서 처음 느꼈고, 이번에 읽은 <한국이 싫어서>에서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이게 바로 장강명 소설의 힘이라고요. 작가의 다른 소설들도 더 읽고 싶어지네요. 

<한국이 싫어서>는 정말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계나'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듯 쓰여 있어요. 그래서 주인공의 사연에 금방 빠져들게 되는 듯 했습니다. 

 

계나는 가정환경과 직장에서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연애를 하면서까지, 한국 사회에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호주로 떠나요. 

 

하지만 호주에서 겪는 일들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영주권에 시민권까지 따낸다 한들, 결국엔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죠. 시민권 취득을 앞두고는 심각한 범죄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계나는 한국이 그립다거나 한국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만큼 한국이라는 나라에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크게 남아 있는 인물이 바로 계나입니다. 

그런 일을 겪은 뒤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별로 그렇지 않았어. 선생님한테 혼난다고 부모님이 고마워지디?

국외자라는 게 참 서럽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나는 이곳에서는 평생 국외자겠구나, 그런 체념도 했지.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169 ~ 170쪽)

저에게도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간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그토록 선망하던 기업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했고, 또 몇 년이 지났을 때 좋은 조건을 제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뿌리치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떠났죠. 

 

그 친구가 다니던 회사가 전 세계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해요.

저도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있는 기업에 계속 남아 있으면 '개 같이' 일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결국은 친구의 선택을 응원해주었습니다. 

 

친구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맛본 후, 더는 한국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지금은 호주가 아닌 다른 나라에 정착해 살고 있지만요.

어쨌든 가족, 친구들을 잠시 만나기 위해서나 출장 차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국에 장기 체류하는 일이 없어졌어요.

나도 알아. 호주가 무슨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아니야. (중략) 그런데 내가 그 시험(시민권 취득 시험) 공부하다가 그래도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 게 있었지.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계나가 '그래도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는 포인트. 그게 제 친구에게도 생긴 거였습니다. 

 

두 나라의 국가를 언급하며 '가사가 비교가 안 돼'라고 말한 계나처럼,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삶의 질이 비교가 안 돼."

 

파트타임으로 일해도, 한국에서 주 6일 일하는 것보다 돈을 잘 번다고 했습니다. 물론 즐길 수 있는 여가 시간도 더 많다고 했죠.

더 많이 일하면서 돈은 적게 벌고, 게다가 개인 시간까지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여서, 단순히 '돈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바로 '나'라는 존재가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대우받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호주가 아무리 아직까지 인종차별이 심하고, 결국엔 국외자로 살아가야 하는 나라라고 해도, 저변에 깔려 있는 '개인의 자유', '사람에 대한 존중'이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청년들이 호주로의 이주, 굳이 호주가 아니더라도 '탈조선'을 꿈꾸고 있는 것이겠죠.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980825

 

청년 10명 중 7.5명 “여긴 ‘헬조선’. ‘탈조선’ 하고 싶다”

청년 10명 중 8명 이상이 한국사회를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회가 되면 한국을 떠나 살고 싶다는 ‘탈조선’ 응답도 75.4%에 달했다.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news.naver.com

지난 연말에 나온 기사인데요. 설문조사에서 청년 10명 중 7~8명이 '기회가 되면 한국을 떠나 살고 싶다'고 답했답니다 . 참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저 또한 해외에서의 삶을 꿈꿨던 적이 있습니다. 혼자 살 때는 잘 몰랐는데,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다 보니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팍팍하게 살아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도 돈이지만, 회사 일이 한창 바쁠 때는 아이가 깨어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잠들면 퇴근하고, 아이가 깨기 전에 출근해야 했으니까요. 

 

아, 그 전에 더 가관인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이의 출산이 임박해서 아내가 입원해 있을 때, 제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 진통하는 아내를 옆에 두고 노트북을 켜 일을 해야만 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집니다. 

 

우리나라는 어쩌다 이 지경이 돼버린 걸까요. 덕분에(?)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좋습니다만, 그래도 그보다 더 좋은 건 이런 소설이 더는 나오지 않는 세상에 사는 것이겠지요. 

 

코로나다 뭐다 해서, 안 그래도 힘든 세상 더 살기 어려워졌지만, 어떤 경우에도 행복해지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계나처럼 말이에요.

 

<한국이 싫어서> 리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해브 어 나이스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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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ing-bean.tistory.com


[그밖에 주목한 문장들]

 

1. "한국 애들은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해. 걔들 눈에는 그냥 영어 잘하는 아시안과 영어 못하는 아시안이 있을 뿐이야." (86~87쪽)

 

2. 한국 애들이 동남아 사람을 얼마나 차별하는지 알아? 농담이랍시고 나한테 이래. "야, 동남아는 좀 암내 나지 않냐? 괜찮냐?" 아니면 "야, 넌 왜 뷔페 와서 볶음밥 먹냐? 인도네시아 볶음밥은 뭐 다르냐?"

 

아마 리키도 그런 걸 알았을 거야. 우리 사귈 때 그렇게 인도네시아 사람과 한국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한 것도 그래서였지 싶은데... (93쪽)

 

3.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103쪽)

 

4.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려면 위험하게 살아야 해, 키에나." (117쪽)

 

5.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내가 무러 하겠다고 나서건 그게 성공할지 성공 안 할지는 몰라. (중략)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지명이가 그렇게 자기 진로를 선택한 거지. 그런데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몰랐어. (151 ~ 152쪽)

 

6.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152쪽)

 

7. 다시 호주로 가던 날에도 지명이가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줬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지금 내가 왜 호주로 가는 걸까. 생각해 봤어.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161쪽)

 

8.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중략)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184 ~ 185쪽)

 

9. 입국 심사대 직원은 무표정하게 내 여권을 받아서 슬쩍 보고 도장을 찍었어.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여권을 돌려 받을 때 내가 말했지. 이민국 직원이 고개를 까딱하며 살짝 웃더라.

 

난 이제 "해브 어 나이스 데이."가 어떤 때에는 냉소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걸 알아. 미국에서 점원들이 주로 쓰는 인사라 영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이 말이 좀 웃긴다고 여기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날부터 이 인사를 좋아하게 됐어. 그날그날의 현금흐름성 행복을 강조하는 말 같아서. 

 

10. 공항을 나오니까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 햇빛이 짱짱해서 난 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선글라스를 끼면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

 

그리고 속으로 결심의 말을 덧붙였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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