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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와 단상들

또다시 드러난 한국 언론의 민낯 | 박원순 서울시장 관련 보도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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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실종 뉴스를 처음 접한 건 저녁 6시쯤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 해보니 박원순 서울시장의 딸에 의해 실종신고가 접수 됐고 수색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대중들의 관심을 곧바로 반영이라도 한 듯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박원순' 관련 검색어들로 도배가 됐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언론사'들까지 나서 추측성 기사들이 마구 올라오기 시작했다. 속보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급기야 저녁 7시쯤엔 '박원순 시신 발견'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걸 믿어야 하나? 오보 아냐?' 싶으면서도 진짜일 수도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경찰 측이 공식 부인하고 나서면서 '박원순 시신 발견설'은 오보임이 밝혀졌다. 경쟁적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던 언론사들은 조용히 기사를 내렸다. 

 

한 유명 경제일간지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지라시가 넘쳐나고 있다며, 그런 것에 현혹되지 말고 사건을 신중히 보자는 식의 기사를 냈다. 그러자 "니들은 그런 추측성 기사 안 썼냐"는 조롱 댓글들이 달렸다.

 

잠시 주춤하나 했던 속보 경쟁은 '박원순 성추행 논란'으로 옮아갔다. 박원순 시장의 행방과 실종 이유가 '사실'로서 밝혀지기 전이었지만, 언론은 이미 '박원순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기사를 쓰는 듯 보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 당했다는 이야기는 곧 경찰에 의해 '사실'임이 공식 확인됐다. 여기에 박원순 시장의 유서가 발견됐다는 보도까지 더해지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란 추측은 더욱 확산했다.

 

그렇게 다섯 시간 정도가 흘렀고, 박원순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 언론은 다시 한번 그들의 수준을 스스로, 아주 멋지게 드러내며 종지부를 찍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러면 안 되지만, 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숨진 채 발견된 듯'이라는 말은 당최 뭐란 말인가. 언론에서 저런 표현을 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언론사'라는 곳에서 친구들끼리 카톡에서나 주고 받을 만한 말을 헤드라인으로 쓰다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까 낯이 뜨거워졌다.

 

묻고 싶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어야 합니까. 기사를 그렇게 처리하면서 부끄럽지 않았나요.

 

저렇게 하면 '우리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기사를 빨리 내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몰랐나요. 아니, 아는데 그건 어찌됐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가요.

 

그동안 우리는 언론의 민낯을 수 없이 많이 마주해왔다.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고 대한민국이 큰 사건을 겪을 때면 언론사도 각성해야 한다는 얘기가 항상 뒤따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언론의 보도 행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언론에 대한 기대는 없다.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나아질 거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뉴스를 소비하는 눈을 높이는 수밖에.

언론의 추측성 기사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내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해야겠다. 


 

고인이 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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