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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의 기록/영화

누구나 필살기 하나쯤은 있으니까 - 영화 <엑시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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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가 화제다. 배우 조정석, 소녀시대 윤아 주연의 일종의 재난 영화인데, 개봉 14일 만에 600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흥행몰이를 했다. 현재는 개봉 두 달이 안 됐는데 천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나는 개봉한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 봤다. 영화 <엑시트>를 처음 접한 건 포털사이트에서였다.

 

이런 저런 뉴스를 보다가 접한 것이어서 딱히 사전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건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 내가 알고 있었던 건 조정석이 나온다는 것, 재난 영화라는 것, 유머 코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암벽등반'이라는 게 주요 소재라는 것 정도였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 웬만하면 재미있게 느낀다. <엑시트>도 그랬다.

 

그런데 <엑시트>에서 느낀 재미를 딱히 사전 정보가 없음에서 왔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릴이 넘쳤고 흥미진진했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통쾌함도 느껴졌다. 

 

영화 <엑시트>의 넘치는 스릴은 단순한 스토리, 그리고 실감나는 화면 연출에서 온다.

 

이런 재난 영화는 대개 그렇지만, 이야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워낙 강렬한 재난이 들이닥치니, 그걸 피해 다니는 장면만 쭉 보여줘도 관객들의 심장을 금세 쫄깃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엑시트>는 그 중에서도 명확하고 깔끔하게 스토리 구성을 해냈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도심 한복판에서 화학테러를 감행했고, 그게 도시 전체로 퍼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극적인 생존 드라마. 

 

비록 그 남자가 왜 화학테러를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속 뉴스를 통해 짤막하게 전해질뿐이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어도 영화 내용에 빨려 들어가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느닷없이 좀비가 등장해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내용의 영화 <부산행>이 떠오를 정도였다. 

 

단순한 스토리 구성을 바탕으로 펼쳐진 장면 장면은 스릴이 넘쳤다. 조정석, 윤아가 도심 속 빌딩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실감나게 연출이 잘 되었고 연기력도 좋았다. 다만 배우들은 촬영하면서 고생깨나 했겠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결말에 이르러서 느낀 통쾌함의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용남(조정석)은 대학시절 암벽등반 동아리 활동을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계속 되는 취업 실패로 집안에서나 또래 사회에서나 존재감이 쪼그라든 상태. 그 와중에 어머니의 칠순은 다가와 "요즘 뭐하냐?"라고 묻는 친척들에게 둘러 싸이는 상황에까지 놓이게 된다. 

 

그때 마침(?) 들이닥친 화학테러. 절체절명의 재난 상황이 용남에게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대학 동아리 시절 갈고닦은 암벽등반 기술과 꾸준히 키워온 근력으로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그뿐만 아니다. 피로연장 부점장이지만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의주(윤아)까지 합세, 더 큰 위기도 극복해나간다. 힘겹지만 조금씩 조금씩,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데 성공한다. 

 

초등학생 조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서글픈 백수 용남과 과중한 업무와 직장 상사로부터 시달리는 서러운 사회 초년생 의주의 필살 생존기. 그것이 결국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을 때 어찌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마침 8월 14일자로 이런 기사가 나왔다. 

"취업자 29만 명 늘었는데... 청년 4명 중 1명은 '실업자'"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우리나라는 지금 심각한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젊은 학생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화려한 스펙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남들보다 돋보이기 위한 노력은 오히려 개개인의 개성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두가 같은 스펙, 같은 능력, 같은 자격증을 갖고 경쟁한다. 

 

하지만 청년들도 인간이다. 좋아하는 관심사, 취미, 특기, 하나같이 다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 <엑시트> 속 용남이 취업에는 계속 실패해도 취미이자 특기인 암벽등반을 계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에게 얘기한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조금이라도 특이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먹고사는 데 도움 안 되는 거 뭐하러 계속하냐'며 타박을 준다. 용남의 누나 정현(김지영)이 용남(조정석)을 구박했던 것처럼.

"젊은이가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갈고 닦은 재주로 세상에 한 방 먹이는 땀내 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 이상근 감독 

만년 구직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본인의 관심사만큼은 버리지 않았던 한 젊은이의 치열하지만 유쾌했던 생존기. 영화 <엑시트>는 그렇게 요즘 시대상을 떠올리게 하며 통쾌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간혹 계속되는 취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힘들어하는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가족, 친척, 그리고 친구들까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이 영화가 작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던 이상근 감독도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완성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로 개봉하게 된 심정을 영화 속 한 장면에 빗대 표현했다.

"용남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산악기술을 발휘해) 옆 건물 옥상으로 처음 점프하는 장면요. 시나리오 쓰며 언젠가 내 필살기는 이거다,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 이상근 감독

스스로 작아지지 말자. 누가 뭐라하든 각자의 삶, 사고방식이 있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만의 필살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누구나 필살기는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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