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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의 기록/영화 & 드라마 후기

부자와 빈자의 공존, 그리고 '선을 넘는다'는 것의 의미

by 꿈꾸는 강낭콩 2019. 6. 10.

​[영화 <기생충> 후기입니다. *스포 주의]

밤 11시 25분.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CGV엔 사람이 꽤 많았다. <기생충> 상영관은 못해도 절반 이상 자리가 찬 것 같았다.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과연 어떤 영화일까’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상영관 가장 뒷쪽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영화를 보면서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차라리 이 영화를 안 보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은 ‘괜히 보러왔어’와 같은 단순한 ‘후회’는 아니었다. 마치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못본 척 잊고 지내려했던 우리 사회의 ‘민낯’ 혹은 ‘불편한 진실’을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영화 초반부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반지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기택(송강호)과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하다가 박사장(이선균)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린다. 기택네 가족들은 가난하다고 주눅들어 있지는 않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악착같이 생활한다. 주거 환경이 좋진 않지만 그들이 불행해보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유쾌하고 쿨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생활력도 강하다. 온 가족이 나서서 소일거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박사장의 집에서도 출중한 연기력과 임기응변을 통해 돈을 벌기 시작한다. (저런 능력이라면 다른 데 가서 정당하게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저러고 살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지점이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 박사장네 가족이 캠핑을 간 사이 집안에서 술판을 벌이는 등 기택네는 슬슬 선을 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스믈스믈, 영화 분위기가 바뀌어 긴장감을 더해간다.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난 박사장의 전 가정부 문광이 찾아오고, 이내 지하실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던 데다, 화려하고 널찍한 고급주택과 극명히 대비되는 지하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거기서 ‘기생충’처럼 살아가고 있는 문광 남편의 존재 또한 충격적이었다. 한편, 영화 제목을 왜 <기생충>으로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박사장의 대저택을 나온 기택네 가족이 홍수로 물에 잠긴 집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장면도 편히 볼 수 없었다. 영화에서만 펼쳐지는 일이 아닐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폭우는 수없이 많이 겪어보았지만 그로 인해 곤욕을 치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박사장네 가족처럼 집 안에서 운치를 즐기며, 또는 잔디밭에서 인디언 텐트를 치고 놀 정도의 여유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일상 생활에는 아무 지장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재난이었을 것이다. 기택네처럼 반지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폭우는 극복하기 힘든, 그야말로 자연 재해다. 그럴 것이라고 당연히 알고 있지만 평소엔 인식하지 못한다.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기생충>에서 마주한 홍수 장면은 나에게 매우 낯설고 생소하고 불편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닫으려고 할 때, 손에 전기가 오를 수 있구나. 홍수가 나면 화장실 변기에서 시커먼 오물이 저토록 무자비하게 솟아오르는 게 사실일까. 대피소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됐을때, 그 심정이 어떨까. 분명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너무나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부자와 빈자의 극명한 대비는 영화 후반부에서 절정을 이룬다. 박사장네는 초등학생 아들의 생일 잔치를 무슨 가든 파티 수준으로 준비하고 비슷한 소득 수준의 지인들도 불러 모은다. 기택네 가족은 대피소에 있다가 초대를 받는다. 아주 초라한 행색으로 말이다.

박사장네 저택 내에서는 1층의 화려하고 고급스런 파티 현장이, 지하에서 벌어지는 난투극과 대비된다. 정원은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찬 반면 지하실은 두 ‘기생충’의 대결로 살벌하다. 결국 그 어두운 기운은 선을 넘어 1층 정원을 향하고,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만다. 비극적 결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선을 넘는다’라는 대사 또는 그런 의미의 행동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화 속 가난한 사람들이 선을 넘으려는 시도를 많이 한다. 기택은 박사장에게 아슬아슬, 선을 넘을락 말락 하는 언행을 계속하고, 가난에 쩌든 그의 냄새는 이미 박사장에게 선을 넘은 것이 되어버렸다.

기택네 가족은 박사장의 저택에 좀 더 뿌리 깊게 자리 잡고자 애쓴다. 기우는 박사장 딸과의 연애, 결혼을 꿈꾼다. 이미 ‘1대 기생충’으로 살고 있던 문광 부부는 박사장네 가족이 없을 때면 자기들끼리 집주인 행세를 하며 즐겼다. 선을 넘으려 할수록 그들은 위험에 노출됐고 결국 불행해졌다.

그렇다면 선을 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가? 그렇지도 않아보인다. 어떤 선을 기준으로 나눠진 세계는 각자의 방향으로 더 나아가게 되고, 결국 서로를 더 멀리하게 될 뿐이다. 선을 넘으려 하면 불행해지는데 그렇다고 선을 지키려 하면 각자의 세계에 갇혀 살게 된다. 그 삶이 불행인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부자와 빈자는 행복하게 공존할 수 없는 걸까.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선’이란 건 과연 무엇일까.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부자와 빈자를 나누고 불행과 고통을 유발하는 그 ‘선’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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