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정유정 장편소설 ‘종의 기원’ 읽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읽었습니다.

‘종의 기원’이라는 표현은 모두가 익숙할 것입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 하면 함께 떠오르는 게 종의 기원이죠.
근데 같은 표현을 쓴 책이 나왔는데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서 호기심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출간 직후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꽤 오래전 일인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좀 색다른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이 책인 걸 보면 제목만으로 꽤나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읽는 데 한 10일 정도는 걸린 것 같습니다. 주로 출퇴근 시간에만 읽은 데다, 평소 읽어왔던 소설과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빠른 속도로 읽기도 어려운 편이어서 그랬습니다.
특히 초반에 속도가 잘 안 붙었는데, 뒤로 갈수록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면서 책장을 빠르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종의 기원은 ‘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 뒤쪽 표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있어요.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한 중반부 정도 갈 때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많아서 왜 저런 문구를 큼직하게 넣어놨을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요. 이야기가 끝날 때쯤 되니까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진짜 악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놀라워서 저도 모르게 탄식을 했어요.
결말이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진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조금이나마 연민을 가졌던 제 감정이 무참히 짓밟힌, 철저히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유진은 십여 년의 세월을 강력한 약물에 의해 통제받는 삶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정확히는 약물 투여를 결정한 어머니와 이모에 의해 통제받아왔다고 해야 맞겠죠.
하지만 어느 날부터 약을 먹지 않아야 비로소 ‘진짜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느끼고 통제 속 ‘일탈’을 즐깁니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표현이 저로 하여금 주인공의 상황을 이해하고, 안타깝다고 여기게 만들었어요.
그런 유진의 상황이 마치 직장인의 삶의 굴레 속에서 힘들어하고 발버둥 치는 저의 모습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유진의 형 유민과 아버지가 바다에서 사망하던 날의 기억을 처음으로 꺼내놓았을 때에도 저는 ‘그래, 역시 오해가 있었던 거였군’, ‘어른들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열 살짜리 아이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기 시작했구나’라는 식의 생각을 품었어요.


그러니 결말에서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죠.
사건의 중심엔 정말 끔찍한 ‘악’이 있었는데, 당사자인 유진은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처럼 자의식마저 감쪽같이 속여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렸던 것이었어요.
그렇게 유진은 어머니, 이모까지 살해하기에 이르렀던 겁니다.

읽고 나서 그런 의문이 남았어요.
과연 유진의 악은 정말 어머니와 이모에 의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이모가 유진의 그런 면을 눈치채지 않았더라면, 유진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았었더라면 다른 모습이 되었을까?
환경이 어떠했든, 유진의 악은 본능이었을까? 필연적으로 생겨날 본성이었을까?
유진과 같이 과학적으로 뇌의 이상 소견이 발견되는 케이스라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나이가 어떻든 조치를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긴 합니다.
유진도 열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형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단순히 ‘홧김에’가 아니라 그 나이에는 하기 힘든 끔찍한 생각과 함께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류의 2~3퍼센트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비둘기의 세상에 태어난 매이자 피식자로 살아가도록 학습받고 억압받으며 성장한 포식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의 기원》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하지만 그 ‘조치’라는 것에 신중한 접근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눌러 담을수록 삐져나오고 새어 나오고 결국은 폭발하기 마련이니까요.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인물들의 심리와 장면 묘사가 많아 처음에는 이야기 전개가 느린 것 같아 읽기 힘들다고 느낀 부분이 많았는데, 조금 참고 읽어나가니까 흡입력이 확 느껴졌던 소설이었어요.

정유정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 계시면 강력 추천드리면서, 오늘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망의 싹 틔우는 하루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