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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눈보라 체이스' 직장인 관점 리뷰

꿈꾸는 강낭콩 2025. 4. 10. 08:00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눈보라 체이스'를 읽었습니다.

눈보라 체이스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키장을 배경으로 쓴 '설산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백은의 잭, 화이트 러시, 연애의 행방, 눈보라 체이스 이렇게 총 네 권인데 저는 눈보라 체이스를 마지막으로 읽었습니다. 
 
이로써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시리즈를 다 읽게 되었네요.

 

1. 줄거리 

억울한 누명을 쓴 다쓰미,
그의 알리바이를
밝혀 줄 '여신'을 찾아라!

 
눈보라 체이스의 줄거리를 딱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추리 소설들은 보통 살인 사건이 발생한 뒤 범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그려지는데요. 이 소설은 좀 달랐습니다. 
 
살인 사건에서 출발한다는 건 똑같지만 경찰은 진범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계속 헛다리를 짚어 아무 죄 없는 대학생 '다쓰미'를 쫓게 돼요.
 
물론 경찰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었지만 알리바이를 뻔히 아는 독자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입니다.
 
다쓰미의 알리바이는 눈보라 체이스의 제일 첫 부분이 제시됩니다. 다쓰미는 신게쓰 고원 스키장에서 보드를 타다 한 여성 스노보더를 만나게 돼요.
 
다쓰미는 셀카를 찍고 있던 여성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주고 조금이나마 담소를 나눕니다. 
 
스키장에서 돌아와서 친구와 시간을 보내던 다쓰미는 자기가 살인자로 쫓기고 있다는 뜬금없는 소식을 접하고는 스키장에서 만났던 그 여성을 찾아 나서게 돼요. 
 
점점 좁혀오는 수사망을 빠져 나가려 할수록 오히려 수상해지는 다쓰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지'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만큼 범인을 쫓는 것이 아니라 경찰의 눈을 피해 알리바이를 밝혀 줄 그 '여신'을 쫓는다는 구도가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던 소설이었어요.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은 소설 후반부에 밝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보라 체이스는 살인 사건 그 자체에는 깊게 들어가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이 정도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추리 소설은 읽고 싶은데 심각한 살인 사건을 다루기보다 조금은 가벼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원하신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드려요.

 

2. 느낀 점 - 직장인 관점

 
눈보라 체이스에서 저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켰던 건 형사 '고스기'였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직장인'인 저의 개인적인 관점입니다 ㅎㅎ
 
고스기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역 현경의 형사입니다. 그런데 (경찰의 입장에서는) 뻔히 보이는 범인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계속 지체되니 윗선에서는 조바심이 나요. 
 
급기야 본청에서 수사에 개입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지역 현경의 윗선들을 비상이 걸립니다.
 
더군다나 본청 수사과의 윗선은 지역 현경 윗선과 라이벌 관계라 위기의식이 더 높아져요. 수사에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주도권을 빼앗기는, 자존심 구기는 상황을 마주하기 싫은 거죠.
 
고스기는 상사들로부터 본청 몰래 수사를 앞서 진행하라는 압박을 계속해서 받습니다.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비공식적인 수사를 강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스기는 점점 불만이 쌓여가요. 
 
이때 고스기가 상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직장인의 애환이 느껴졌고 또 공감되기도 했어요. 속으로 구시렁대거나, 참을 수 없이 불만을 표출하는 순간에는 속이 후련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라고. 연락은 자주자주 하도록 해. 이상이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가!"

고스기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 시라이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나서 회의실을 나왔다. 전직,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106쪽)

(계장에게 부탁을 하며)
"가능하면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색깔이나 무늬는 말만 들어서는 이미지를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난바라가 다시 혀를 찼다. "원하는 것도 많네."

계장님이 먼저 무리한 지시를 했잖습니까,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네, 죄송합니다." (155쪽)

"안녕하시기는 뭘 안녕하셔? 전혀 안녕하시지를 못 해. 자네들 대체 지금 뭐하고 있어?" 난바라가 아침부터 콧김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계장님이 지시하신 대로 사토자와 온천가의 차들을 점검하고 다니는 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찾았어?"

"찾았다면 진즉에 연락을 드렸겠지요." (191쪽)

 

나는 퇴사,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스기는 본청 형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다쓰미를 먼저 잡는 데 성공해요. 하지만 이내 다쓰미는 진범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상사의 지시를 거스르는 선택을 합니다. 
 
거기에는 다쓰미를 쫓다가 만난 '유키코'라는 여성이 한몫을 단단히 해요. 유키코는 고스기의 수사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가 상사의 강압적인 요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게 돼요.
 
고스기에게 뭔가 '꿈틀'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유키코는 고스기가 자신의 소신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증인을 찾건 찾지 못하건 고스기 씨는 와키사카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일을 해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장기 말이거든요. 장기 말은 입 딱 다물고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고스기는 풋콩을 입에 던져 놓고 잔을 기울였다. (305쪽)

"그래서, 고스기 씨의 '꿈틀하기'는 어떻게 되죠?"

"나요? 그건 어떻다기보다......." 

"고스기 씨 역시 아무 야심도 없이 경찰관이 된 건 아니잖아요. 경찰 조직이 어떤 것인지 나는 짐작도 못 하겠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못 할 만큼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곳인가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고 있죠? 하지만 고스기 씨는 꿈틀하는 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장기 말이라고 그저 하라는 대로 움직이기만 해도 되나요? 때로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움직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결과, 한 방 크게 역전의 공을 세워버리면 진짜로 속이 시원할걸요?" (309쪽)

회사를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없구나, 나는 장기판의 말이구나, 그냥 부속품일 뿐이구나. 
 
'진짜 나'라면 절대 납득하지 않았을 일들을 '상부의 지시'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상황들도 많이 벌어집니다.   
 
그런 게 반복되면 점점 시키는 일, 꼭 해야 하는 일, 주어진 일 외에는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돼요. 
 
최근에 회사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예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지난 2~3년간 제가 보여줬던 성과가 무색해질 정도였어요. 
 
그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 오히려 제가 이상하다는 식으로 가스라이팅까지 당합니다. 정말 속이 썩어가는데 위에서 찍어 누르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답답한 요즘이었는데요. 
 
유키코가 고스기 형사에게 했던 말,
 
"당신의 '꿈틀하기'는 어떻게 되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못 할 만큼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곳인가요?"
 
이 말이 훅 날아와 가슴에 꽂혔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대사가 꼭 나한테 하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눈보라 체이스에서는 그게 이 두 문장이었어요. 
 
직장생활이 힘든 건 자기 자신을 버려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나를 지킬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보라 체이스를 보면서 저도 언젠가는 고스기 형사처럼 불합리한 것에 맞서는 '꿈틀하기'를 통해 속시원한 일을 벌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해봤습니다. 

ㅋㅋㅋㅋ속이 시원!
그래서,
당신의 '꿈틀하기'는
어떻게 되죠?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눈보라 체이스' 리뷰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망의 싹 틔우는 하루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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