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일기

<신친일파> 독서 일기 1 : 이영훈이라는 사람은 왜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나

반응형

최근 벌려놓은 일들 수습하느라 책을 잘 읽지 못했네요. 이제 좀 하나 둘 마무리가 되어서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었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백만인의 서평단을 통해 받은 책, 호사카 유지 교수의 <신친일파>입니다.  

책이 두꺼운 편인 데다 소개되는 내용이 정말정말 많습니다. 다 읽고 리뷰를 쓰기에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책을 읽어가며 느끼는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짤막하게 나마 글로 남겨보려고 합니다.

 

먼저 프롤로그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저자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반일종족주의>는 어떤 책이고 저자인 이영훈 교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내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반일종족주의>의 일부분을 인용하고 거기에 반박하는 논리를 제기하는 식인데, 너무 많아서 어느 것 하나를 따로 떼서 소개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네요.

 

프롤로그 마지막 부분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영훈의 논리에는 자신이 '거짓말'로 간주한 것들을 공격하기 위한 또 다른 허위나 은폐가 너무나 많이 동원되었다. (중략) 또한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하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와도 같다.

필자는 '노예근성'을 되풀이하는 이영훈의 논리와 글이 한국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필자는 그 우려스러움을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본서를 썼다.

독자 여러분은 본서를 통해 거짓에 사실을 섞어 사람을 속이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악마가 있다면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신친일파> 중 33쪽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왜 책 제목을 <신친일파>라고 지었는지도 이해가 됐어요.

 

프롤로그를 넘기고 저는 책장을 좀 더 뒤로 넘겨 2부를 펼쳤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부분이었거든요.

 

1부는 강제징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도 당연히 중요한 역사이지만, 저는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었던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가 떠올라서 이 이슈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여기서도 프롤로그와 같이 이영훈 교수가 <반일종족주의>에서 주장한 위안부 관련 내용을 인용한 뒤, 그게 어떻게 왜곡된 것인지 증명하고 반박합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글을 보면서 계속해서 든 생각은, '이영훈이라는 사람은 왜, 도대체 왜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는가'였습니다.

이영훈은 1916년 이후 조선 내에서 '공창제가 대중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로 나간 여인의 상당수가 기생 양성소인 권번 출신이거나 요리옥의 기생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권번 출신이거나 요리옥의 기생출신자가 일본군 '위안부'가 된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피해 여성들은 매춘에 대해 잘 모르는 보통 여성들의 업자의 말에 속아서 전선에 끌려갔다. (107쪽)
이영훈이 인용한 글은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속 몇 군데에 있는 여러 문장들을 가져와서 마치 한 단락인 것처럼 만든 글이다.

먼저 첫 번째 문장에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위안부'를 단순한 매춘부로 주장하는 일본 우파가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전체적인 포로 심문 보고서의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논리에 필요한 극히 일부분만을 인용하는데, 이영훈도 일본 우파가 쓰는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110~111쪽)
'제4차 위안단'의 동원은 1942년 5월 초에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을 위해 업자들을 경성(서울)에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앞에서 말한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에 기록된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함께 ('군 위안소'에 근무한) 박치근 일행은 버마로 갔다. 이때 일본군은 약 703명의 여성들을 배를 통해 버마로 보냈다.

이들은 일본군에 의해 계획된 '제4차 위안단'이었다. 그렇다면 제1차부터 제3차 위안단도 존재했다는 이야기이므로,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 '위안부' 동원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번역자)은 지적한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렇게 만들어진 버마의 일본군 '위안소'는 군의 세밀한 통제하에 있었지만 위안소는 어디까지나 업주 개인의 경영이었다고 강변한다. (121~122쪽) 

<신친일파>를 조금만 읽어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대부분 역사적 자료의 일부를 떼어 와 짜깁기 하거나 거짓으로 살을 붙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자료의 원문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반박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영훈 교수는 왜 그러는 걸까요. 왜 일본 우파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서는 걸까요. 그에 대한 호사카 유지 교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결국 돈만 주면 성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논리는 돈이 가장 가치가 있으니 다른 것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의 발상이다.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의 본질은 물질만능주의라고 스스로 비판하는데, 그의 견해가 물질만능주의 그 자체다.

이영훈은 경제학자이니 돈이 제일 가치가 있다는 발생을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경제학자가 돈을 인권보다 중요한 가치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이영훈을 비롯한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은 물질만능주의나 배금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종족주의자일 텐데, 왜 한국 사람들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비판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종족주의'라는 말은 아마도 자신들을 관찰해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뜻으로 그들을 '친일 종족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다. (118~119쪽)

물질만능주의나 배금주의 신앙에 빠졌다라...글쎄요. 호사카 유지 교수의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새로운 친일' 행보가 완벽히 설명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애초에 그들은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는 거겠죠.

그들의 생각과, 그에 반박하는 호사카 유지의 이야기를 더 읽어보고, 공유할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또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응형